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25 전쟁 (문단 편집) == 기타 == * 이 전쟁에서 대한민국과 북한 양쪽 모두 어디도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지는 못했다. [[대한민국 국군]]은 [[강계시]]를 단 한 번도 점령을 못 했으며 [[조선인민군]] 역시 [[부산광역시]]를 단 한 번도 점령을 못했다. * 미국의 역사학자 존 톨랜드가 [[윌리엄 딘]] 장군의 유족을 찾아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당시 딘 장군이 전쟁 중에 얻어먹었던 음식 중 하나가 [[마늘]][[장아찌]]였는데, 딘 장군은 마늘장아찌의 맛에 매우 감탄하여 일부러 하산해서 더 얻어오기까지 했다. 전후 [[샌프란시스코]] 육군 장교 회관에서 [[백선엽]]과 점심을 먹으면서 하는 말이 "백 장군, 요즘 내가 말이지요, [[김치]]를 잘 담근답니다. 한국에서 생활하다가 김치 맛에 푹 빠졌나 봅니다." 였다고 한다. * [[정전 협정(6.25 전쟁)|정전 협정]]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전선 각지의 부대에 알리는 전보를 쳤던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송해]]였다고 추정된다. 고향이 이북([[황해도]])인 송해는 6·25 전쟁 당시 전보병으로 근무했는데, [[KBS2]] [[김승우의 승승장구]]에 출연하여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당시에 쳤던 [[모스 부호]]를 기억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앞서 소개된 [[이승만]]과 로버트슨의 정전 회담 중 1번 항목의 상호 안전 보장 조약은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결실을 맺었다. * [[이오시프 스탈린]]은 6·25 전쟁 중 [[인민재판]]에 대한 정보를 전파받자마자 "[[김일성]] 동무는 이 미친 짓을 중단하지 않고 무얼 하는 건가?"라며 매우 빡쳤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공산군이라는 집단은 [[인민]]의 협조를 얻는 것을 미덕[* 미덕이기 이전에 생존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스탈린도 [[우크라이나 대기근|남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그가 그 "미덕"을 무시할 수 있었던 배경은 강력한 집권 체계와 전시 동원 체제가 완비된 다음이라 점령지 주민을 짓밟아도 전쟁을 수행하는 데 지장 없었기 때문이다.]으로 삼는 집단인데 그 인민에게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짓을 하는 건 정신나간 행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탈린에게는 충격적이겠지만 인민재판을 도입한 이는 다름 아닌 김일성 본인으로, 스탈린은 자제하길 바랬던 그 짓을 김일성은 되려 자기가 앞장서서 부하들에게 명령한 것이다. * 이 전쟁에서 양측이 [[한반도]]에서 사용한 탄약량은, 2차 대전기 유럽 전선 전체에 쏟아부은 것에 비견될 정도로 많다.[* 물론 중공군은 [[비뢰포]] 같은 빈자의 무기를 사용해서 직접 비교는 곤란하다.] 전선이 교착된 후에는 하루에 수십만 발을 쓰기도 해서, '밴플리트 탄약량'이라는 소비량 단위 신조어가 생기기도 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6·25 직전의 국지전 때 국군 포병대가 사용한 탄약량을 보고 '좀 아껴 효율적으로 쓰라'며 탄약 보급량을 줄이고 탄약고를 걸어 잠근 것이 미국 고문단이었다는 것. 근데 이건 고문단의 잘못이 아니라 초기 한국군이 대책 없이 탄약을 낭비한 게 문제였다고 보는 게 맞다. 미군이 1949년 6월에 5,100만 발의 각종 탄약을 제공했는데, 6개월 동안 3,000만 발 이상을 소모했다. 그 와중에 옹진반도에서는 6일 동안 105mm 곡사포탄 5,572발, 각종 박격포탄 19,000여 발을 포함하여 100만 발 이상을 소모했고 전과는 북한군 69명 사살. 거의 북한군 한 명 죽이는 데 14,700여 발을 쓴 거다. 포탄만 따져도 1명당 350발을 넘기는 판이라 고문단장인 로버츠 준장이 "한국군이 탄약을 너무 낭비하니 달라는 대로 주면 답이 안 나온다"는 소리를 할 지경이었다. 참고로 당시 1개 포병대대가 동원되었으니 15문의 야포가 투입된 셈이니 1문당 하루에 62발을 갈겨댄 셈인데, 미군 포병의 탄약 제한이 105mm 야포는 하루에 50발로 제한되어 있었고 저 양이 크게 부족한 것도 아니었으니, 얼마나 갈겨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제임스 밴 플리트|저렇게 탄약을 소모해서 전과라도 있었으면 모를까]][* 물론 항목에 들어가 보면 알겠지만 정말 아무 효용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미군도 6.25 때 세계대전 급 화력을 퍼부어서 돈을 너무 많이 낭비했다. 그렇게 갈겨서 올린 전과가 최대로 잡아도 (즉 모든 적 병력이 105mm 탄에 죽었다고 가정할 경우) 69명 사살하는 데 그쳤으니 제한을 걸어도 할 말이 없다. * 6·25 전쟁 중 미군의 흑백 인종 통합 운영이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인 [[미 육군]] 부사관, 아이작 우더드(Isaac Woodard, 1919~1992) 병장 피격 사건으로[* 1946년 2월 12일 미 육군에서 명예 제대하고 민간 버스 편으로 집으로 귀가하는 도중 화장실에 가고 싶어 휴게소 정차를 요구한 아이작 우더드 병장과 이를 거부한 버스기사 사이에 시비가 붙자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들이 아이작 우더드 병장을 집단 구타 후 유치장에 불법 감금하고 부상당한 눈을 치료를 하지 않고 방치하여 실명에 이르게 한 사건으로 [[NAACP|전미 유색인 지위 향상 협회(NAACP)]]에서 이 사건을 공론화하여 미합중국 정부의 흑백 분리 정책 철회를 이끌어냈다.] 제33대 미합중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은 유색 인종 차별을 개선하기 위해 1948년 7월 26일 행정명령 9981호를 통해 미군 내의 인종 간 분리 정책 폐지를 명령했다.[* 당시에는 주요 전투 병력은 대부분 [[백인]]이었고 [[흑인]]과 [[황인종]], [[히스패닉]]등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입대 자체가 힘들었다. 입대했더라도 대부분 비전투직에다 인종별로 나누었다. 지금이야 [[다민족국가]]의 대표 주자지만 이 시절만 해도 미국은 '백인의 나라'였다.] 당시 미 해군과 공군은 즉시 대통령의 명령을 수용했지만, 보수적인 미 육군과 해병대는 그렇지 않았다. 미 극동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를 비롯한 당시 대다수 미 지상군 고위 지휘관들은 미 합중국 대통령의 이 행정명령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무시된 채 남아있던 흑인 연대인 제24보병연대가 6·25 전쟁에 급파되고[*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연대장 성씨가 화이트였다고 한다. 전쟁 전 한국 근무 경험이 있어서 백선엽하고도 안면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저런 논란을 거쳐 맥아더 해임 후인 1951년 10월 1일 [[매튜 B. 리지웨이]] 장군은 24연대와 같은 유색 인종 부대를 해체하고, 유색 인종 장병들은 인종 통합을 위해 백인 부대로 전출시켰다. 이후부터는 백인 부대에서도 흑인 신병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 육군]]에서 완전한 인종 통합이 이루어진 것은 전쟁이 끝난 후인 1954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더더욱 보수적이었던 [[미 해병대]]는 1952년부터 백인 부대에서 흑인 신병을 매우 제한적으로 받았고, 1960년이 되어서야 완전한 인종 통합이 이루어졌다.[* 지금처럼 피부색 따윈 상관없이 여러 인종의 병사들이 같은 참호와 막사에서 먹고 자며 부대끼는 풍경은 6·25 전쟁 당시에는 아주 생소한 모습이었으나 베트남전에 이르러서는 매우 당연시되었다. 물론 아직 [[인종 차별]]이 만연하던 시절이라 [[유리천장|장교진은 대부분이 백인이었고]] 끼리끼리 어울리거나 패싸움을 하는 등 순탄치만은 않았다.] [[보수주의|보수]]의 끝판왕인 군에서 민간보다 먼저 인종 간의 화합을 시작하도록 명령한 트루먼 대통령의 혜안은 역사적으로 높게 평가받을 만하다. * [[하와이]]의 [[한국계 미국인]]이나 [[일본계 미국인]]도 적지 않게 참전했으며 용산 [[전쟁기념관]]의 전사자 명비에서 이들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PARK, WATANABE 등) 유명한 인물로는 한국계 [[김영옥(군인)|김영옥]] 대령, [[장진호 전투]]의 [[중국계 미국인]] [[커트 리]] 해병 중위가 있다.(중국명 리추웬) 커트 리 중위는 중공군 포로가 "[[중국인]]이 제국주의자가 되었냐"며 발악하자, [[영어]]로 "나는 커트 추웬 리 중위이고 [[미합중국 해병대]] 소속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커트 리는 현재 타계하였고 "중국계로서 중공군과 맞서는 것이 어렵지 않았냐"는 질문에 "나는 용맹한 미합중국 해병대의 장교로서 명령에 따랐고, 부하들과 함께 고국([[미국]])으로 귀환했다. 그것이 다이다."라는 굵직한 소회를 남겼다. 그리고 중공군 측에는 통역병으로 다수의 [[조선족]]이 참전했고, 한국군 측에서는 역시 비슷한 용도로 [[화교]]들이 지대급 병력으로 참전하거나 일선부대에 배속되었다. 전후 근래 들어 지속적 청원으로 화교 참전병들은 훈장수여로 명예회복을 한 상태. 이는 한국 화교의 절대다수가 [[대만]]계이기에 가능했던 사항으로 보이며 대만에서 "전 병력을 파견, 참전해서 북진 후 본토(중국) 수복을 하고 싶다"며 UN측에 의사를 전달했으나 확전을 우려한 맥아더에 의해 묵살당하였다고 한다. 이 외에도 캐나다, 영국군에 배속되어 전투에 임한 호주, 뉴질랜드 연합군인 ANZAC군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야전에 있어 미군, 터키군을 비롯한 유엔군의 정예였으며 의정부, 양주, 가평 등지에서 용맹하게 싸운 정예부대이다. 경기북부에 이들의 전승비가 있으며 소수로 중공군 인해전술을 대파한 전사는 호주 역사에 남을 정도. 당시 미군 장성이었던 월튼 워커 중장은 호주군에게 "강철과 같은 병사"들 이라는 찬사를 남겼다. * 북한의 남침과 동시에 지구 반대편 브라질에서는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제4회 브라질 월드컵]]의 개막전 킥오프가 있었다[* 그 유명한 [[마라카낭의 비극]]이 일어난 그 대회이다.][* [[리우데자네이루]] 현지시각 기준 1950년 6월 24일 15시에 개막전이 열렸는데 리우데자네이루는 서울과의 시차가 12시간이지만 당시 대한민국은 서머타임을 실시하고 있었으므로 동시발생이 맞다.]. 북한의 남침이 시작되고 있을 때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은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를 탈탈 털고 있었으며 경기 결과는 '''브라질 4:0 멕시코'''였다. * [[관우]]의 67대손이자 [[관평]]의 66대손인 관충금(關忠金)이 중공군 신분으로 이 전쟁의 1·4후퇴에 참전하였다. * [[1960 로마 올림픽]]과 [[1964 도쿄 올림픽]] 남자 마라톤을 2연패한 [[아베베 비킬라]]가 이 전쟁에서 에티오피아군 참전 부대인 강뉴 부대의 대대장 경호병으로 참전했었다. * [[아폴로 계획]] 당시의 우주 비행사였던 [[닐 암스트롱]] 역시 6·25 참전 용사이다. [[미 해군]] [[장교]]로, [[F9F 팬서|F9F-2B 팬서]]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하였다. 그와 함께 아폴로 계획에 참여했던 우주 비행사 [[버즈 올드린]]도 [[미 공군]] 소속의 [[F-86]] 세이버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하여 소련군 전투기를 격추시키는 군공을 세운 6·25 전쟁 참전 용사이다.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의 레전드 [[테드 윌리엄스]]는 포항 K-3 비행장에 주둔한 미 해병대 제33해병항공전대 311해병공격비행대대에 소속되어 [[F9F 팬서]] 조종사로 참전하여 총 39회의 전투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미국인 최초로 지구 궤도를 도는데 성공한 [[존 글렌]]이 그의 윙맨으로 함께 작전에 참가하였다. * [[뉴욕 양키스]] 역사상 최고의 투수로 칭송받는 [[화이티 포드]]와 [[월드 시리즈]] 역사상 유일하게 [[퍼펙트 게임]]을 기록했던 [[돈 라슨]] 역시 6.25 전쟁 참전용사이다. * [[영국]]의 원로 영화배우 [[마이클 케인]] 역시 이 전쟁에 [[영국 육군]]의 병사로 참전하였다. * 제12대 [[필리핀 대통령]]인 [[피델 라모스]] 역시 이 전쟁에 참전한 참전용사이다. * 제48대 [[미국 부통령]] [[마이크 펜스]]의 부친인 에드워드 펜스(Edward Joseph Pence Jrㆍ1929~1988)도 6·25 참전 용사이다. 미 육군 소위로 참전한 그는 이 전쟁에서의 활약으로 동성무공훈장을 수여받은 전쟁 영웅이다. * 연합군의 요청으로 [[연합군 점령하 일본]] 병사 60명이 참전했다. [[일본군]]이나 [[자위대]] 자격이 아니라 미군 군속(군무원) 자격으로 참전했는데, 원래 전투병이 아닌 [[조리병|취사요원]]으로 참전했었지만 워낙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조리병에서 소총수로 역할이 전환되어 실전에 투입되었다. 이 중 2명의 일본인이 전사했다고 한다. 1명은 실종되었고, 그 중 1명이 [[다부동 전투]]에서 전사했는데, 그의 이름은 '히라츠카 시게하루(平塚重治)'이며 그의 동생 히라츠카 아키마사(平塚昭正)가 직접 다부동 전투의 격전지 중 하나인 경상북도 가산으로 찾아오기도 했다.[[https://www.sedaily.com/NewsView/1Z44KDCWB3|#]] 또한 일본은 구 해군을 중심으로 일본 특별 소해대를 편성해 원산, 군산, 인천, 해주, 진남포 등에서 기뢰제거 등 목적으로 1,450명이 동원되었으며,[[http://kor.theasian.asia/archives/84286|#]] 최소 57명이 사망했다. *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 참가한 미국의 스키 선수 [[린지 본]]의 할아버지 도널드 킬도도 6·25 참전 용사이다.[* 또한 본의 전 남자친구였던 [[타이거 우즈]]의 부친은 [[베트남 전쟁]] 참전 용사이다.] 특히 그는 동계 올림픽이 열린 [[정선군]] 인근에 주둔한 부대에서 복무했다고 한다. 다만 안타깝게도 킬도는 손녀가 자신이 목숨을 걸고 싸워 지킨 땅에서 열린 올림픽에 출전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이 때문에 린지 본은 할아버지의 유골 일부를 [[정선 알파인 경기장]]에 뿌렸다고 한다. * 미국 출신 방송인이자 가수 연습생인 [[마리아 엘리자베스 리스]]의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참전용사 출신이라고 한다. * [[케이툰]]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연재되었던 완결 웹툰 야오네집 21화에서는 6·25 전쟁을 거쳤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작가의 어머니는 피난길에 친어머니에게 버려지려다가 그걸 본 유엔군의 흑인 군인이 "아이를 버리지 말라"고 어머니에게 준 담요와 크래커로 버텼고, 그럼에도 결국에는 나무에 묶인 채로 버려졌는데 이를 후퇴하던 북한 인민군의 한 군인이 보고는 안쓰럽게 여겨 나무에서 풀어주고 돈을 쥐어주고는 마을에서 따뜻한 걸 사먹으라고 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작가의 어머니는 그 유엔군에게 고마워서 아프리카 고아를 입양하고 싶다고 말버릇처럼 말했고, 겨울만 되면 길가에 보이는 군고구마 장수의 모자를 보면 그 인민군이 생각나서 항상 고구마를 사 온다고 한다.] 그 돈을 가지고 마을로 내려가다가 한국군 장교의 눈에 띄었고, 그 장교의 지인에게 맡겨졌다가 우연히 그 집을 찾아왔던 영어교사 부인이 데려가 부부가 양녀로 삼았다고 한다. 덧붙여 작가가 어린 시절 옆집에 살았던 할머니는 평소보다 불편했던 체험쯤으로 회고했다고 하고, 작가의 시어머니는 맛있는 음식들이 많았던 시절로 기억하고, 작가의 아버지는 평범하게 [[모내기]]하다 미군부대 카투사에 들어가 [[스크램블 에그]] 만드는 법을 배워온 게 다라고 한다. * 이 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의 [[6월 26일]], 즉 전쟁이 일어난 [[1950년]] [[6월 25일]]과 월과 일이 거의 비슷한 시기인 [[1949년]] [[6월 26일]]은 '''백범 [[김구]]가 암살되었던 날이었다.''' 그러니까 전쟁 발발 다음 날인 1950년 6월 26일은 백범 사망 1주기를 맞이하였던 해였다. 이것은 대한민국에 하나의 [[징크스]]처럼 굳어져 가고 있는데, 이른바 '''30년 주기 국장설'''로, 30년 간격으로 국상을 치르고 나면 반드시 대규모 유혈사태를 겪는다는 것. 첫 번째로는 1919년 [[고종(대한제국)|고종]] 황제 승하 후 [[3.1 운동]]으로 대규모 학살이 일어났으며, 2번째가 1949년 김구 선생 서거 후 발생한 이 전쟁, 3번째는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전두환]]의 집권 과정에서 일어난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 4번째는 2009년 [[김대중]] 대통령 서거 후 일어난 [[천안함 피격 사건]]과 [[연평도 포격전]]이다. * 1950년 5월에 첫 발매하였던 [[칠성사이다]]는 사이다 출시 1달 만에 전쟁으로 사이다 생산이 중단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 밀리터리 FPS 게임인 [[콜 오브 듀티 시리즈|콜 오브 듀티]]와 [[배틀필드 시리즈]]에는 2020년 6월 현재까지 '''단 한 차례도''' 배경으로 등장한 적이 없다.[* 콜 오브 듀티의 경우 몇몇 등장인물들의 배경으로 간간히 언급되었고 미래전을 다룬 어드밴스드 워페어에선 2차 한국전쟁 미션이 있기도 하다.] 북미권에서의 “Forgotten Wars”라는 이미지가 강한 것도 있고 무엇보다 오랫동안 정전 상태인 데다 중국군이 적으로 나와서 중국 시장에 출시가 불가능해지기에 게임으로 내놓기에 섣불리 판단하기 어려운 전쟁이다. * 이 전쟁 때문에 [[대한민국 국군]]에서는 매년 [[6월 25일]]마다 전투 준비 태세 훈련을 한다. * [[제주도]]가 전쟁 당시 전장이 되지 않았던 이유 때문에, 실제 제주도로 [[국부천대|한국 정부를 피난시키는 방안]]이 나타나기도 했다.[* 전쟁 초기 [[낙동강 방어선]]으로 [[대한민국 국군]]이 밀려났을 때, [[이승만]] 대통령이 측근으로부터 "제주도로 피난해야 한다"는 제안을 들었으나 이를 묵살했다고 한다. [[월튼 워커]] 미8군 사령관은 아예 [[대한민국 정부]]를 [[서사모아]]로 이전하는 계획을 고려하기도 했는데, 이때 정부 이전 후보지 중에 제주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단, 제주도는 면적이 너무 좁고 농경, 식수 환경이 척박하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결국 후보지에서 제외되었다.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면서 [[1.4 후퇴]]로 대표되는 위기가 닥치자, [[미합중국 합동참모본부|미국 합동참모본부]]와 [[유엔군사령부]]가 북한군과 중공군이 금강-소백산맥 방어선을 도달할 경우, 한국 정부를 제주도로 이전해서 차후 공세 전환의 거점으로 삼자는 구체적인 안건이 나왔지만 연합군이 서울을 재탈환하면서 백지화되었다.] 만약 현실이 되었더라면 지금의 [[중국]]과 [[대만]]의 [[양안관계|관계]]처럼 되어버렸을지도. * 제주도가 전장이 되지는 않았지만 제주도는 이미 [[제주 4.3 사건]]으로 말이 아닌 상태였다. 게다가 4.3 사건으로 구속되어 본토로 수감된 사람들은 당시 전국에서 벌어진 학살로 인해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 당시 제주 출신들은 4·3 사건으로 인해 빨갱이 이미지가 덧씌워져 많은 수의 제주인들이 전쟁 때 해병대에 입대해 싸웠고 상당수의 해병이 제주 출신이었을 정도였다. * 지금도 서울 중심부에는 '9·28 서울 수복 작전' 당시의 치열한 전투를 암시하듯 '''오래된 건물이나 유적지의 석재 등을 살펴보면 탄흔이 남아있다'''. [[경복궁]], [[숭례문]], [[흥인지문]] 등의 건축물은 물론 신라 시대 때 세워진 [[북한산]]의 [[진흥왕 순수비]]에는 지금도 선명히 탄흔들이 남아있으며, [[연세대학교]]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동상 또한 살펴보면 기단에 수많은 탄흔을 볼 수 있다. * 중공군은 말도 안 되는 미군의 화력을 막기 위해 지하 만리장성을 수천 km 규모로 건설했다. 중공 기록만이 아니라 UN군 기록에도 실제로 효과가 있어서 공격하는 데 화력 지원을 할 수 없어 피해가 심했고 결국 UN군의 계속된 공세로도 밀지 못하고 포기했다고 한다. * 매년 6월 25일 [[대한민국 정부]] 주관으로 6.25 전쟁 중앙 기념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전쟁 발발일이 여름철이고 참전용사들 대부분이 고령의 [[노인]]인 점을 고려해서 [[장충체육관]]이나 [[잠실실내체육관]] 등 서울시내 체육관에서[* 1930년대 중반 이후에 태어나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이들도 21세기 기준으로 모두 70세 이상의 노인이 됐다. 젊고 건강한 청년들도 6월 하순의 더위와 땡볕 아래에서 야외 행사를 치를 경우 온열질환 관련 안전사고에 대한 우려가 크다. 청년들보다 체력이 떨어지는 70대 이상의 노인들의 경우 온열질환 관련 안전사고의 위험성이 몇 배나 더 높다.] 행사를 치르고 있다. 부득이하게 야외에서 행사를 치러야 할 경우 [[서울공항]]에서 진행했던 2020년 제70주년 기념행사처럼 기온이 낮보다 낮은 야간에 치르고 있다. * 일부 언론사에서는 6·25 전쟁 [[정전 협정(6.25 전쟁)|정전 협정]]을 맺은 1953년 7월 27일을 [[종전]]일인 것처럼 쓰고 있는데, '''엄밀히 말하면 6·25 전쟁은 종전된 것이 아니다.'''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정전과 종전은 엄연히 다른 거다. 풀이하자면 정전은 전쟁을 잠시 정지한다는 뜻이고, 종전은 전쟁을 종결한다는 뜻으로 확연하게 다르다. 매년 6월 25일마다 기념식을 국가에서 주최하는 것도 단순히 전쟁이 있었던 걸 기념하는 게 아니라 '''아직 전쟁이 진행 중이니까''' 사기 진작과 애국심 고취를 위해 행사를 갖는 것이다. 다만, 전쟁 양상이 '''전면전에서 국지전으로 바뀌었을 뿐'''이며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제2연평해전]] 등 계속 '''전투가 발생했다.''' * 한국군의 [[전투보병휘장]]은 6·25 전쟁 기간의 공적으로만 수여하고 이후 폐지하였다. * 한국인에겐 가장 임팩트 있고 현재에도 영향이 있는 2개의 근현대사 이벤트[* 다른 하나는 [[일제강점기]].] 중 하나지만 그동안 세계사로 볼 땐 [[제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 전쟁]] 사이의 이벤트 정도로 취급되었다. 물론 냉전 시기 [[제1세계]]와 [[제2세계]]가 맞붙은 첫 무력 분쟁이라는 상징성이 있지만, 전쟁 과정과 전후의 임팩트가 앞뒤 전쟁들만 하지 못해 묻힌 감이 있었다. 하지만 2010년대 말부터 미중 관계에 긴장감이 돌며 재평가되었고 특히 중국에서 미국과 처음으로 싸운 6.25 전쟁, 정확히는 전쟁 내 중공군을 고평가하기 시작했다. 2020년에 관련 영화만 3개 이상이 나왔고 [[방탄소년단]]이 6.25 전쟁 때 대한민국 쪽의 참전 용사들에 감사를 표하자 [[중국 네티즌 한국 연예계 저격 사건|전국적인 보이콧이]] 있었을 정도였다. * 대한민국의 참전 용사들이 제대로 된 대우를 못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참전 이후 받은 돈은 32만원 정도밖에 안 되고, 정신적 부담이나 신체적 부담에 대해서도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 1966년부터 1969년까지 [[비무장지대]]에서 크고 작은 분쟁이 있었는데, 이를 일부에서는 '''제2차 한국전쟁(Second Korean War)'''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3년에 걸친 분쟁에서는 한국(남한)-미국(주한미군) 측의 승리로 끝났다. 당시 한국군 1사단, 주한미군, 카투사 등이 참전했으며 중소규모 국지전, 게릴라전에서 박격포를 사용한 소규모 포격전까지 있었을 정도로 나름 격렬했고 파주, 문산, 동두천까지 총탄음이 들렸을 정도였다. * 정전 기간이 워낙 길다 보니 참전국[* 비공식 참전국 포함] 중 [[그리스 왕국]]은 [[그리스]]로 왕정이 폐지되고, [[남아프리카 연방]]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이 되고, [[서독]]과 [[동독]]이 통일하고,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은 [[독립국가연합]]의 국가들로 [[소련 해체|쪼개지고]], [[에티오피아 제국]]도 [[에티오피아]] 공화국이 되는 등 많은 국가들이 사라졌다. * 한국전쟁 과정에서 국군과 유엔군에 잡힌 인민군 포로들 중 일부는 정전 후 북한으로의 송환도, 남한으로의 귀순도 아닌 제3국행을 원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대부분은 남북한 당국자들의 설득, 회유로 남한에 남거나 북송되었으나, 76명의 포로들은 끝까지 남한도 북한도 선택하지 않은 채 결국 한반도를 떠나 이들을 수용할 의사를 밝힌 인도, 브라질, 아르헨티나로 흩어져서 떠났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은 이러한 남도 북도 아닌 제3국행을 택한 포로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며, MBC에서는 이들의 이후 행방을 추적하여 1992년에 6.25 특집 다큐멘터리 "76인의 포로들"을 제작, 방영하였다. * 이 전쟁 직후 [[미군]]은 [[한국]]의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한국에게 햄, 소시지, [[베이크드 빈즈]] 등을 주었는데 이것을 찌개로 끓인 것이 '''[[부대찌개]]'''이다. 한국에서 발명되었으며 부대찌개의 기원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 이 전쟁에서 공산권 국가로 참전한 나라들은 72년 후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카타르 월드컵]]에서 모두 기권 또는 지역예선에서 탈락하거나 실격당했다. 즉, 북한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기권, 중국은 베트남에게 져서 탈락, 러시아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우크라이나를 침략한 죄]]로 실격당했다. * 우연의 결과이기는 하나 6.25 전쟁의 시작과 끝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은 대한민국 역사에 남는 인물이 되었다. 먼저 6월 25일 새벽 4시에 전선에서 다발적으로 올라오는 보고를 접하여 본격적인 침략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최초로 인지한, 즉 공식적인 6.25 전쟁의 시작을 접한 육군본부 당직 장교는 후일 [[5.16 군사정변]]의 주역이 되고, [[국무총리]]를 2번 맡은 유력 정치인이 되었다. 또한 [[정전 협정(6.25 전쟁)|정전 협정]] 석상에서 정전 사실을 협정장 밖으로 전달하며 6.25 전쟁의 끝을 알린 한 무전병은 훗날 유명 [[코미디언]]이자 국민 누구나 모르는 사람이 없는 [[방송인]]이 되었다. 그 두 사람이 각각 [[김종필]]과 [[송해]]다. * 일본 연예기획사 [[쟈니스]]의 창립자 [[쟈니 키타가와]]는 1952년 [[CIA]]소속으로 전쟁에 참여하였다.[* [[일본계 미국인]]이었기에 당시 병역의무가 있어 징집되었다.] 10개월만에 [[한국어]]를 마스터 한 후[* 훗날 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우던 쟈니스 소속 아이돌의 발음을 교정해주기도 했다.] 판문점에서 전쟁고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주는 동시에 첩보활동을 하였으며 고아들에게 미군들의 세탁물을 세탁해오는 일을 시키면서 수익을 만들어줘 고아들이 자립할 수 있게 해주었다. * [[블라디미르 푸틴]]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수행하면서 해당 전쟁을 [[참고]]하여 분단국가로 만든 계획이 있었다는 사실이 존재한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58888#home|중앙일보 기사]] [[https://ua.korrespondent.net/articles/4551735-dvi-krainy-koreiskyi-stsenarii-myru-dlia-ukrainy|우크라이나어 신문기사]] 전선이 고착화된 2023년에 이 전쟁에 대한 언급이 많이 거론되고 있다.[[https://m.yna.co.kr/view/AKR20230814128900009?section=international/all|예시]] * [[한국광복군]] 출신의 장교들도 전쟁 과정에서 다수 전사하였다. 개전 초기 서부전선에서 북한군 제4사단과 제일 먼저 교전하다가 [[동두천 전투]]에서 전사한 [[제7보병사단|수도사단]] 제1연대 제2대대장 [[이의명]] 소령을 시작으로 [[장철부]], [[김영남(독립운동가)|김영남]], [[차약도]], [[박영진]], 박재화, [[이건국]], [[최철]], [[이무중]], [[이건국]], [[이진영(1907)|이진영]] 등이 전사하였다. 이 중 [[제6보병사단]] 소속으로 동부전선에서 전사한 박영진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광복군 인면전지공작대 소속으로 [[임팔전투]] 등에서 활약하였다. 전사한 광복군 출신 장교들은 대부분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서 활동하거나 일본군 탈출 후 광복군에 편입한 20~30대의 젊은 장교들이며 이들이 전사하면서 광복군 계열 고위장교들의 명맥이 다소 약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 이 전쟁에 참전했던 용사들을 위한 국립묘지가 [[국립호국원]]이다. 애초에 국립호국원을 조성하게 된 계기가 수요에 비해 묘역 공급이 부족했던 6.25 전쟁 참전 용사들을 위한 보훈 강화 차원이었다. 6.25 참전에 대한 공적이 인정돼 [[국가유공자]]로 등록된 사람과 유공자의 배우자는 사망 후 국립호국원에 안장될 수 있다. * 대한민국이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한국인들을 [[제주도]], [[일본]], [[사모아]](서사모아)로 이주할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일단 제주도는 토지가 대부분이 현무암으로 이루어져 있어 농사가 불리하고, 일본으로 가기엔 안 그래도 일제강점기를 겪고 해방이 된 지 얼마 안 된 한국인이 극구 반대할 가능성이 상당히 늪을 것이고, 남은 건 사모아(서사모아)로 이주할 가능성이 있다. 만약 대한민국이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지금 대한민국는 [[폴리네시아]] 국가가 되었을 것이고,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